
경상국립대(총장 권진회) 인문대학 영어영문학부 영어영문학전공 한지희 교수가 쓴 『HWAZAENG: Literary Explorations of Pax Eras in Global History』(화쟁: 세계사 속 팍스 시대의 문학적 탐구)가 미국 GH & IT 출판사에서 나왔다. 228쪽 분량의 이 영문 학술서는 2020년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일반공동연구지원사업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NRF-2020S1A5A2A03042145)의 결과물이다.
"제국이 '평화'라 부를 때, 문학은 침묵을 기록한다." 한 교수는 이 문장을 화두로 삼는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지만, 문학은 승자가 감추려 한 진실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제국들은 '팍스(Pax)'라는 이름 아래 안정과 황금기, 문명 질서를 선포해 왔다.
그러나 한 교수는 그 평화가 '타자'를 주변으로 밀어내고 변방의 목소리를 지운 위에 세워진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제국의 선전이라는 거울 뒤를 들여다보며, 공식 역사 서술이 놓쳐 온 균열과 저항의 흔적을 문학 텍스트에서 찾아낸다.
이를 꿰는 방법론이 불교 철학의 '화쟁(Harmony and Conflicts)'이다. 신라 원효의 사상으로 잘 알려진 화쟁은 서로 다른 주장들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조화의 길을 모색하는 사유다. 책은 이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 고통을 비추는 일종의 '문틀(doorframe)'을 세우고,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독법을 제안한다. 로마 시대 오비디우스의 『비가(Tristia)』에 담긴 양가성에서부터 현대 팍스 아메리카나 시기의 실존적 딜레마에 이르기까지, 문학이 제국 권력을 단순히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전복해 왔음을 보여준다. 문학 작품을 '그림자의 역사 기록'으로 읽음으로써 헤게모니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넘어 억눌린 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이 책의 의의는 학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팍스 시대를 다루는 세계사 연구에서 한국 문화가 등장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 책은 각 시대의 팍스를 문학 연구자의 시선으로 조명하되, 그 해석의 틀로 한국 고유의 인문학 개념인 화쟁을 내세웠다. 서구 중심의 이론 틀을 빌려 쓰는 데 머물지 않고, 한국의 사유를 세계사 해석의 방법론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이승휴의 글쓰기가 지니는 문화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장이 함께 실렸다. 당(唐)이라는 거대 제국의 질서 속에서 활동한 최치원, 그리고 몽골 제국의 영향 아래에서 『제왕운기』를 지어 민족사의 계보를 새롭게 쓴 이승휴의 글쓰기를 세계사의 팍스 담론 안에서 읽어낸 것이다. 한국의 고전 문인이 세계사 담론의 한 장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이번 성과의 학술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 교수는 저서 출판을 기념해 10월 8일(목)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에서 학생들에게 이 책의 최치원 장을 직접 소개하고 설명했다. 이날은 고문헌도서관 특별전시회 《시대를 앞서간 개척자, 고운 최치원》(9월 2일~10월 8일)의 마지막 날이었다. 국내외 학생들은 국내 고문헌 속 최치원의 자취와 함께, 그가 세계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새롭게 읽히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를 가졌다.
한 교수는 "이 책이 학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규정하는 '이야기의 전장(戰場)'을 들여다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